비르비타는 책을 덮었다. 쉬폰의 구작이었다. 몇 년 전이었더라. 10년? 11년? 더 예전일 지도 모르겠다. 출간 당시, 어린 천재라는 타이틀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은 금세 집중이 되었다. 이 이후에도 여러권 책을 냈고 지금은 펜을 놓은 상태. 글을 쓰지 않은 지는 꽤 되었지만 쉬폰은 글을 쓰는 속도가 꽤나 빨랐고 단기간에 여러 책을 냈었기에 쌓여있는 양이 꽤 되었다. 추리 소설은 여전히 마지막권이 나오지 않았고, 의문의 초대장을 따라 저택에 모이지도 않았다. 대신 비르비타와 쉬폰은 재회했다. 생각보다 담백한 만남이었다.
눈에 대해서 서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안부와, 생활과, 초대장과 같은 이것저것을 이야기하면서 세네번쯤 만났을 때 비르비타는 드디어 쉬폰의 책을 읽기로 결심을 했었다. 추리소설은 좋아하는 분야가 아니었기에 처음은 고등학교시절 냈다고 하던 사랑소설을 읽었다. 사랑을 하고, 여주인공은 목을 매었다. 죽음마저 사랑인 글이었다. 비르비타는 공감하지 못했다.
당신이 내 글을 읽을 줄은 몰랐습니다.
베스트셀러라기에 예의상 읽었어요. 필력이 좋네요. 쉬폰은 비르비타의 말이 겉치레라는 것을 알았다. 비르비타는 흥미가 없는 것에는 그닥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다. 책을 덮은 비르비타는 살짝 웃어보이고는 그것을 책장에 빈 자리에 꽂아넣었다.
사랑소설은 두 권이던가요?
그렇습니다.
둘 다 여주인공이 죽어버리네요. 목을 매고.. 썩어 방치된 사체를 보니 조금 이해가 안되네요. 얼굴을 보관할 생각은 없었나 봐요. 사랑한다면.. 오래 보고 싶을 거 아니에요.
이번에 공감하지 못한 것은 쉬폰 쪽이었다. 사람은, 겉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거라면 나는 석고상을 사랑했겠죠.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면..
어머, 태우 씨. 꽤나 로맨티스트네요.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서태우 씨. 비르비타는 일부러 나른하게 이름을 부르며 쉬폰의 이마를 검지로 툭 쳤다. 당신은 너무 꽉 막혔어요. 예쁜 오른쪽 눈을 선물해줬는데도 불구하고, 나한테 성을 내잖아요. 말을 마친 비르비타가 입을 닫자 방 안이 침묵으로 채워졌다. 쉬폰은 대꾸하지 않았다. 화나보이진 않았다. 비르비타가 다시 말을 꺼냈다.
다음 소설은 안 내나요?
보고 싶습니까.
있나요?
쉬폰이 걸음을 옮겼다. 비르비타는 군말없이 따라갔다. 쉬폰의 거주지는 꽤나 컸고, 혼자 살았으며, 고용인은 예민한 그를 위해서 일정 시간대에만 방문했기 때문에 건물 자체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비르비타는 그 점이 조금 마음에 들었다.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지나서 어느 방에 이르르자 쉬폰은 문을 열었다.
가구 하나 없이 벽지와 바닥재만 대충 깔린 방에 밧줄이 매달려있었다. 아래에는 간단하게 생긴 의자가 놓여있다. 꼭 목을 매달기 위한 준비같았다.
이번에는 간만에 사랑소설을 써볼까 합니다. 조금 관점을 바꾸어 의사에 대해서 써보려고 하는데, 전문가 의견이 어떤가 해서 불렀습니다.
이 곳은..
비르비타가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를 방안에 밀어넣고는 문을 잠궈버렸다. 비르비타가 그를 돌아보았다. 소설의 내용을 상기시킨다. 사랑을 하고, 여주인공은 목을 매었다. 죽음마저 사랑인 글이었다..
아, 혹시 말 안했습니까? 내 소설의 사랑이 늘 목매달아 죽는 이유는 내 사랑이 목매달아 죽었기 때문입니다.
쉬폰은 작게 웃었다.
늘 내 사랑은 목을 매달아 죽어버린다니까...
이거 봉구님 요청으로 지호지애+지은.. 지애가 지은이를 죽여버렸다~
달그락 달그락, 하고 조용한 실내에서 식기와 수저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는 음악 하나 들리지 않았고, 조명은 식탁을 비추는 것 하나만 켜놓았기 때문에 실내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침묵을 깨듯 느즈막하게 말을 거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뭐 했어? 잘 지내고 있었어? 내가 일을 하는 바람에, 늘 누나랑 있어주지 못하니까... 소녀는 씹던 음식을 마저 삼키고 있던 일을 전부 이야기했다.
오늘은 탐정님이, 읽고 싶은 책이 있다고 해서 구해왔었어. 근처 서점에 가서..
어떤 책? 도지은 씨가 뭘 좋아하더라. 신작이었어?
신작이었어. 이번에 새로 출간한다고 해서.. 작가 이름이 뭐였더라. 조금 독특한 사람이었는데..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알겠다는 듯 아~하고 웃었다. 그 사람 알지. 유명하잖아. 쉬폰인가 뭔가. 인터뷰를 했었는데 진짜 싸이코같더라고. 할 수 있는 게 없냐니까 나보고 뭐랬지, 내 소설에 당신을 등장시켜서 죽일 수 있습니다~랬나?
재잘재잘 잘도 있던 일을 늘어놓자 소녀가 작게 웃었다. 소년이 하는 이야기는 주로 일에 관련된 것이었고, 소녀가 하는 이야기는 주로 집에서 같이 지낸다던 탐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제는 탐정을 위해 커피를 탔고, 엊그제는 탐정을 위해 화분을 사왔으며, 저번께는 탐정을 위해서 무명화가가 그린 작은 액자를 사와 걸어두었다는 이야기였다.
인생의 대부분이 탐정이라는 양 소녀는 탐정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탐정님이 그 작가를 꽤 마음에 들어하셔서, 지호 네가 그 작가랑 인터뷰하는 줄 알았으면 싸인을 받아달라고 하는 건데.. 소년은 턱을 괴고 경청했다. 다만 표정에서 지루함이 한껏 묻어나왔다.
신작, 신작이라.. 그 작가 신작 안 낸지 몇 년 넘지 않았어? 근데 오늘 신작을 사왔다고?
그래? 서점에 있던데..
소녀가 조금 조급하게 식기를 긁어댔다. 나는 그냥, 탐정님이 부탁하셔서 다녀왔더니.. 있길래...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 내가 바빠서 몰랐나보다. 몰래 발간했었을 수도 있고. 이야, 진짜 팬인가보네. 나도 몰랐던 신간 소식을 먼저 접하고 말이야. 아니면 좋아하는 작가가 쉬폰이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가보지... 말끝을 늘이던 소년이 소녀를 의식하며 바라보았다. 소녀는 시선을 음식에 처박고 의미없이 음식을 긁어대고 있다. 누나, 그러고보니
닫힌 방문이 열리지 않은 지 두 달이 지났다. 달그락 달그락, 하고 조용한 실내에서 식기와 수저가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는 음악 하나 들리지 않았고, 조명은 식탁을 비추는 것 하나만 켜놓았기 때문에 실내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침묵을 깨듯 느즈막하게 말을 거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뭐 했어? 잘 지내고 있었어?
소녀는 일상을 둘러대기 시작한다. 두 달째 소녀는 탐정을 위한 신작을 사러 서점에 들른다. 늘어지는 테이프처럼 말을 반복하는 소녀가 재미있어서 소년은 턱을 괴고 경청한다. 달그락 달그락.